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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집한국어

할머니의 밤 한 알

보리는 온 동네에서 제일 작은 아이라서, 할머니 부엌 식탁 밑을 허리도 안 굽히고 걸어 다녔다.

오늘 할머니는 밤죽을 끓였다. 보리는 삶은 밤을 그릇에 담는 일을 맡았다. 한 알도 빠뜨리지 않고 다 담는 것이 보리의 바람이었다.

"할머니, 나 다 담았어요!"

그런데 밤 한 알이 데구루루 굴러 식탁 밑으로 들어갔다. 보리는 얼른 따라갔다.

"잡았다!"

손이 닿으려는 순간, 밤이 또르르 더 멀리 굴러갔다.

"할머니, 밤이 도망가요."

"아이고, 할머니는 죽을 저어야 해서 못 가겠네. 안 저으면 죽이 냄비에 눌어붙거든. 보리가 잡아 보렴."

보리는 엎드려서 팔을 쭉 뻗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밤은 또 쏙 굴러갔다.

보리는 숟가락을 가져왔다. 숟가락을 쭉 뻗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숟가락이 밤을 톡 건드리자 밤은 더 멀리 굴러갔다. 보리는 너무 서둘러 몸을 밀다가 머리를 식탁 다리에 콩 부딪혔다. 식탁 위에서 그릇들이 달그락거렸다.

"괜찮니, 보리야?"

"괜찮아요. 근데 밤이 미워요."

보리는 그만 바닥에 앉았다. 그때 보리는 보았다. 밤이 멈추지 않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식탁 다리를 지나, 쌀독을 지나, 부엌문 쪽으로 쪼르르.

"어? 바닥이 기울었나 봐."

보리는 밤을 쫓아가지 않았다. 대신 빈 그릇을 들고 부엌 구석에 앉았다. 밤이 가는 길의 끝, 쌀독 옆이었다.

보리는 가만히 기다렸다. 죽이 보글보글 끓었다. 할머니의 국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보리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톡.

밤이 보리의 그릇 안으로 쏙 들어왔다.

"할머니, 밤이 내 그릇으로 왔어요!"

"어머, 용하네. 밤이 보리한테 오고 싶었나 보다."

보리는 그릇을 두 손으로 꼭 안고 할머니 곁으로 갔다. 냄비에서 하얀 김이 폭폭 올라왔다. 부엌 가득 달콤한 냄새가 퍼졌다. 보리의 그릇 속에서 밤 한 알이 노랗게 반짝거렸다.